사막의 은둔자, 성안토니우스 교부가 했던 말인데 “형제를 얻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요, 형제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영국의 시인 윌리엄 브레이크 William Blake, 1757~1827는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은 진정한 이미지뿐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2014년 3월 내한 방문한 일본인 사사키 아타루는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이란 책을 썼습니다.
무신론자였던 그에게 그리스도인의 이미지가 ‘기도하는 손’이었나 봅니다.
이렇듯 이미지는 세상살이에서 스펙만큼이나 중요한 요소이자 정체성입니다.
불교에 ‘돈오頓悟‘와 ’ 점수漸修‘라는 말이 있습니다. 깨달음을 얻는 데 ‘한 번에 큰 깨달음을 얻는 것’을 돈오라고 한다면, ‘학습과 수련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는 것’을 점수라고 합니다.
인간이 현실을 직면하면서 환상을 깨는 것은 곧 성숙한 단계로 들어감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말은 곧 돈오라는 과정을 통해 깨달음을 얻게 되는 필연적 회심의 순간이 생기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은총이 있어야 얻게 되는 ’ 거듭남’입니다.
그런데 에바 피에로 신부는 이 말을 좀 더 풀어서 설명해 줍니다.
“자신의 나약함을 아는 환멸에서 벗어나 환상을 깨고 열광의 현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때 ‘열광’은 그리스어로 enthousiasme이라 하는데 en은 ‘하나’라는 뜻이고, thous는 ‘하느님’의 뜻이므로 열광은 ‘하느님과 하나 된 자’를 의미 합니다.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먼저 이웃이 나에게 죄지은 것을 용서한 후에 하느님께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실 것을 구하라”고 말씀하고 있어요.
용서와 사랑은 그런 힘이 있답니다.
구원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우리가 깨달음의 회심과 하느님으로부터 죄 사함의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타인을 용서하는 이미지로 살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타인을 용서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사랑하는 힘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우울증이 현대인들을 정신적 가학자이자, 사회적 문제의 예비 피의자로 만들고 있는 사건 사고들이 끊임없이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말은 개인의 이미지가 완전히 바뀌는 놀라운 사건으로서 자신을 먼저 사랑하면 하느님이 타자를 무한히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 스텝으로 전환할 수 있습니다.
에고이스트와는 다릅니다. 에고리스트는 자신의 이익과 만족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예수와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한 겁니다.
사랑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자기 부정성를 통해 타자에게 나아가는 에고ego의 포기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 해를 열광적으로 살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 나를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맡기는 결단을 하시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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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묵상
개역개정 마태복음 6장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