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가엽게 여기며 삽시다.
불교에서는 묵언수행(默言修行)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려면 부지런해야 하는데 나는 그렇지 못한 편이서 기도 수행을 할 때 불교의 이 말이 좋습니다.
아버지처럼 평생 골방에 들어가 새벽 기도를 하시거나, 성실한 기도생활을 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자란 나는 목사가 된 이후로도 실천에 엄두가 안 났던 것이 새벽기도였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마음에 항상 믿는 바를 새기며 특별히 말하지 않고 묵언 기도로 사는 선택을 했고, 그런 실천으로 그나마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었습니다.
선불교에서 말하는 평정심은 현상을 보지 말고, 마음의 믿음을 기억하라는 의미가 있는데, 묵언수행이 그런 기도의 삶과 비슷한 개념일 겁니다.
그럼 무엇하러 기도를 하나요.
하나는 자신을 위하여, 다른 하나는 타자를 위하여 기도 하는데, 주야창천晝夜長川 자신만을 위해 기도 한다면, 글쎄요. 차라리 어디가서 그리스도인이라 말씀하지 마시고 사시는 것이 덕이 될 겁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에게는 지금 하느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서 양심으로, 성서의 말씀으로 좋은 이웃이 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이 지닌 본질입니다.
+
장황하게 서두가 길었던 이유는 믿음, 기도, 감사가 있는 삶이 충만해도 사람 사는 세상에서 벽에 부딪치는 때가 종종 발생하는데, 누군가 공감할 수 없을만큼 고집스럽게 자기 경험에 기대어 변하려 하지 않는 대상이 나타난다면 당황스럽습니다.
그때마다 체념 섞인 말로 “사람은 고쳐 쓰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떠오르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누구도 비난해서는 안됩니다.
판단은 나의 몫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리스도인은 늘 마음판에 새기며 살아야 합니다.
정치적 지향점이 다른 것, 가치관이 다른 것, 심지어는 사차원의 인물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오히려 모두가 허물 투성이 죄인이기 때문에 차라리 당황스러운 이웃을 만나면 동병상련同病相憐의 마음으로 서로 가엽게 여기는 것이 옳습니다.
하지만, 공의와 정의는 분명히 따져 묻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 후에 하느님께 아뢰며 회개하는 것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일겁니다. 그래서 예수가 필요한 것입니다.
++
말씀묵상
개역개정 마태복음 9장
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대통령 탄핵찬성 시위, 깃발의시대가 시민의 삶이 되어버린 안타까운 대한민국을 가엽게 여겨 주옵소서. 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