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시는 하느님
"인간이 기도를 하면 신은 인간의 방법이 아니라 신의 방법으로 답하신다."
이 말은 '마하트마 간디 Mohandas Karamchand Gandhi'의 말입니다.
때론 하느님은 우리의 직접적인 기도가 아니더라도 하느님의 방법으로 응답을 하시는데, 가장 명증한 것이 있습니다.
기도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할 때부터 개입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무엇을 실천하란 말인가요.
나의 경우, 신약성서 마가복음 12장 30절~31절의 말씀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너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나는 2003년 11월 어느 날 이 말씀을 읽고서 빛을 보았다고 간증함이 옳을 것입니다.
'이웃 사랑을 평생 삶의 이정표로 삼아 살아야겠다."라고 다짐한 후부터 실제로 삶의 패턴을 바꾸어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놀라운 경험을 하기 시작했는데, 교리적으로만 알았던 하느님이 나의 기도를 듣고 '행하시는 하느님' 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마치 집과 학교와 직장 외에 교회 말고는 행동반경 폭이 좁았던 나로서는 스스로 어항 속 금붕어라고 표현할 정도였는데, 이런 사람이 어느 날부터 저 태평양 바다 한가운데로 옮겨 놓으신 것과 같은 바다의 물고기로서 삶을 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교가 불교와 다른 것은 우리의 이성으로 철학적 사고를 하고, 관념으로 사상과 지식을 확장하며 지성의 만족감을 누리는 것, 그 너머에 계시는 하느님의 창조세계를 마음의 믿음으로 경험한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이 정도면 예수를 믿는 것이 재미가 없을 수 없지요.
내가 생각만 해도 짧게는 하루, 길게는 한 달 안에 그 결과를 보고, 경험하게 하시는 일상이 펼쳐지니까 말입니다.
석가모니가 제자들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것이 두 가지가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인간은 어디서 왔습니까.
다른 하나는 인간은 죽어서 어디로 갑니까.
그의 대답은 무응답이었습니다.
당연히 몰라서 그러지 않았을까 합니다만, 그는 지금 "어떻게 사는가에만 정성을 다해도 잘 살기가 어려운데 내세까지 고민하면서 살 수 없지 않으냐"라고 반문했다고 합니다. 의당 불교는 내세 종교는 아닙니다. 철학이요.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깨달음을 얻는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천국을 말하는 그리스도인이 인간으로서 지금 이 순간을 정성을 다해 사는 것에 대해 배우지 않고서, 어찌 내세를 논할 수 있다는 말인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불교를 배우라는 말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의 삶을 좀 더 진중하게 여기고, 하느님이 만들어 주신 창조세계를 아름답게 가꾸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문화재청장을 역임했었던 미술사학자 유홍준 교수가 "아는 만큼 보인다"라고 했었습니다.
인간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 역시 아는 만큼만 할 수 있다면, 이웃을 사랑하는 것도 아는 만큼만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상황을 모르고 교리적으로 타자를 사랑한다고 하면, 경우에 따라서는 오히려 상대를 죽이고, 망가뜨리는 역설적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왜냐고요. 인간은 결코 선하기만 하지 않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죄성이 강한 존재이고, 야비하고, 잔인함까지 지닌 존재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악해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행하시는 행동은 나의 그런 죄성을 고백하고, 나아가는 것으로만 해결되지 않으며, 더 나아가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결단하고 행동할 때 비로소 하느님도 행동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몸을 신에게 바친 사람은 인간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마하트마 간디 Mohandas Karamchand Gandhi

기도하는 성 프란체스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