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서울시 도봉구로 이사하고 좋은 것은 식사 후에 언제든지 산책할 수 있는 장소가 생겼다는 것과 벤치에 앉아 사색할 수 있는 즐거움입니다.
오늘 설교에서 “겁쟁이가 기도 많이 한다.”는 화두를 80세가 넘은 원로 목사가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중세의 안셀름(Anselm of Canterbury, 1033–1109)의 신 존재 증명으로 그 유명한 “존재론적 증명 ontological argument”을 말씀하시면서 함께 엮어 미국에서 20세기 초에 빌 브라이트(Bill Bright)가 만든 ‘사영리 The Four Spiritual Laws’ 교리에 대해 과감하게 비판하셨습니다.
1997년 한국감리교회에도 미국의 복음주의 신학에서 설파한 사영리가 <교리와 장전> 개정본에 삽입됨으로써 감리교회의 다양성 신학은 종말을 맞았습니다.
신학 하는 학자들과 목사는 자신에 대해서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때론 무신론적 철학자의 말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Ludwig Feuerbach, 1804–1872)는 그의 대표작인 《기독교의 본질》(Das Wesen des Christentums, 1841)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신은 인간의 이상적 특성(전능, 사랑, 정의 등)을 투사한 결과일 뿐이다.”
실존론적 철학자 하이데거의 말로 설교자는 마무리했습니다.
“인간이 없으면 우주가 없다.”
꼭 유홍준 교수가 말했던 “사람은 아는 것만큼 보인다.”라고 했었던 글과 대칭되는 느낌입니다.
인간의 모습은 원래 아름답습니다.
기독교의 원죄론에 의하면 인간은 악한 존재이지만, 신은 아름다운 인간을 복원하기 원했으나 인간은 아름다움을 선택하기보단 신에게 복 받는 샤머니즘적 주술신앙을 더 선호했습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신화학입니다.
예수를 기복신앙적으로 믿는 것은 주술적 신앙심이며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1884–1976)은 ‘비신화화 demythologization’를 말하면서 “신앙의 실존적 왜곡‘을 비판하였습니다.
“신앙은 존재의 근원적 결단이며, 이 결단은 인간 실존의 전체를 요구한다. 그러나 복을 얻기 위한 신앙은 신앙을 자기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킨다.”
대형교회 출석하여 복 받기를 희망하는 기독교 신앙이 주술적 신앙임은 물론이고, 2천 년 전 이스라엘 유대 땅에 오셨던 예수와는 전혀 무관한 신앙이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
말씀 묵상
개역개정 요한복음 15장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