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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비로운 분을 어찌하오리까

corsicastar 2025. 2. 27. 23:29

작품 : 폭풍이 몰아치는 스헤닝겐 해안 1882.8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3~1890.7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테오 반 고흐Theodorus van Gogh, 1857~1890’
“테오에게
최근 스헤닝겐의 풍경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폭풍이 거세게 불어오기 직전의 바다는 몹시 인상적이다.
폭풍이 몰아치는 동안에는 파도를 잘 볼 수가 없고 일렁이는 광경도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정말 거센 폭풍우였는데, 소리도 별로 내지 않으면서 아주 격렬하고 인상적이었다. 더러운 비누 거품
같은 색으로 일렁이던 바다 끝에 작은 고기잡이 배가 하나 있었고 어둠 속에 흐릿하게 보이는
인물 몇몇이 아주 작게 보였다. 그림 속에는 무한한 뭔가가 있다.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자기감정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건 정말 매혹적인 것이다. 색채들 속에는 조화나 대조가 숨어 있다.
그래서 색들이 저절로 조화를 이룰 때면 그걸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는 게 불가능해 보인다.”
-1882.8-

나는 고흐의 이 그림을 보면 베드로의 고기잡이가 연상됩니다.
나사렛 예수가 공생애를 시작했었던 곳은 ‘긴네렛‘이라고도 하고, 갈릴리 호수라고도 불렸던 곳이었고, 신약에서는 디베랴호수라고 불렀는데 이는 헤롯 안티파스가 로마 황제의 이름을 따서 건설한 디베랴 도시 앞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디베랴호수 북쪽의 정중앙에는 베드로가 예수를 처음 만났던 곳으로 현재는 ‘베드로 수위권 교회’가 섰는데, 그곳에서 바로 위로 20분 걸어서 올라가면 예수께서 마태복음 5장에 말씀을 하셨던 산상수훈의 장소인 ‘팔복교회’가 있습니다.
이 팔복교회에서 갈리리 호수를 내려다보면 저 끝자락까지 호수의 수평선과 지표가 맞닿는 곳이 보이고, 그 넘어에 가늠이 되는 곳이 떠오르는데 한참 가다보면 여리고를 지나 오른쪽으로 가면 요단강이고, 왼쪽으로 가면 예루살렘이 있는 곳이 상상으로 펼쳐집니다.
팔복교회에서 갈릴리 호수가 아닌 왼쪽 뒤로 구릉 너머에는 골란고원이 있어서 그 위에서 바라보면 왼쪽은 레바논의 눈덮인 헬몬산(시룐)이 있고, 오른쪽엔 시리아의 국경선에서부터 지평선이 끝없이 펼쳐집니다.
시리아의 봄, 민주화의 봄이 필 것만 같았던 그곳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권력투쟁으로 피바다가 되었고, IS가 장악하면서 지옥으로 변했던 나라, 아픈 시리아 국경선을 마주하는 곳입니다.
성서에서는 솔로몬의 성전을 지을 때 레바논 두로에서 백향목을 공수했고, 시돈에서 잣나무를 가져다 헬몬산을 지나 이곳 골란고원을 거쳐 갈릴리 호수를 경유해서 예루살헴까지 어떤 수래로 이동해 성전을 지었을 것입니다.
지금처럼 트럭이 있었던 시대도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갈릴리 호수는 호수 그 자체로도 풍요로운 어획자원이 있는 곳이지만, 건기에는 광야와 같은 이스라엘의 대지에 생명을 주는 호수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호수에는 성서 요한복음 6장 18, 19절에 있듯이.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 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저는 갈릴리 호수에서 큰 풍랑이 발생한 것이 기적이 아닐까, 그 속에서 예수께서 걸어오신 것은 두 번째 기적 같았습니다.
이 호수는 풍랑이 일만 한 곳은 아닐 것 같은 이유가 달의 인력으로 조수간만이 생길만한 바닷물도 아니고, 분지로 둘러 싸인 호수이며,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유관으로 보이는 잔잔한 호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갈릴리 호수의 풍랑은 마가복음 4장 39절-41절에도 나옵니다.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나의 호수 풍랑의 의문은 어쩌면 내가 갈릴리 호수에서 건기가 아닌, 바람불고 비가 내리는 우기에 한 달 정도 머물면서 궁금증을 풀어야 할 것 같습니다.
성서의 말씀이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아서입니다.
“풍랑이라니요. 이 호수에서 무슨 풍랑이 일겠는가!“
풍랑이 이는 디베랴호수를 눈으로 봐야 믿을 수 있을 것 같아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서의 말씀을 참 믿음이 없이 읽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는 이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인생에서 불어 닦치는 풍랑의 삶과 맞닥뜨린다면 하느님이 날 건져주시겠는가, 쯔쯔’
이것이 의심 많은 예수의 제자 도마의 모습이고, 나의 모습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아래 성서는 말씀합니다.

“너희 권능 있는 자 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시편 29:1-2)

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구세주로 믿으며 예배드리는 것은 아직 조금 남아 있는 믿음을 하느님께서 불쌍하게 여기심이 틀림없습니다.
이 자비로우신 분을 어찌하오리까.

++
말씀 묵상
개역개정 히브리서 12장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9.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