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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문을 여십시오.

corsicastar 2025. 3. 1. 18:13
Willaim Holman Hunt <The Light of the world>

 
윌리엄 홈맨 헌트 Willaim Holman Hunt가 그린 유명한 사실주의 그림인 '세상의 빛 The Light of the world'은 신약성서 요한계시록 3장 20절 말씀을 회화로 표현한 사실주의 화풍의 그림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요한계시록 3:20)

이 그림의 원본은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 '케블 칼리지Keble College, Oxford' 예배당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작가는 19세기 영국의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 PRB'의 창립 멤버로써 게블 칼리지 무브먼트를 이끌었고, 성서의 이야기를 매우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하는데 노력한 것을 볼 수 있으며 "The Light of the World"는 빅토리아 시대 영국에서 가장 사랑받은 종교 그림 중 하나로, 복제본이 많이 제작되어 교회와 가정에 널리 퍼졌습니다. 
이 그림을 잘 보면 가시관 쓰신 예수님이 어떤 집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문 주변에 넝쿨처럼 보이는 식물이 문을 막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해보면 이 문은 오랫동안 열린적이 없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께서는 등불을 들고 이 집 문을 두드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자세히 보면 이 문에는 밖에 문고리가 없습니다. 안에서만 열 수 있는 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 하느님의 세계로 들어서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열었을 때 시작되는 세계임을 말해주는 회화입니다.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는 미국의 철학자 입니다. 그는 미국 실용주의 철학인 Pragmatism의 창시자로써  건강한 종교가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요소를 말했는데, "첫째가 거룩하고 활기 찬 예배이고, 둘째가 신앙고백이며, 셋째가 응답 받는 기도"라고 했습니다.

예배는 믿음을 가진 사람만 할 수 있는 예전입니다.
그는 "믿음이 먼저이고, 그 후에 믿음이 진리로 증명될 수 있다"고 했는데, 이런 그의 주장은 인간이 하느님을 향해 가질 수 있는 ' 의지적 신앙Will to Believe'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그의 논문 <The Will to Believe>에서 "인간이 신앙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합리적 증거가 불충분할 때도 신앙을 가질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철학적으로 탐구했는데 신앙을 단순한 감정적 선택이 아니라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정당화할 수 있는 '합리적 결정'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런 그의 주장은 영국 철학자 '윌리엄 K. 클리퍼드William K. Clifford'에게 비판을 받았는데 클리퍼드는 <신앙관 윤리The Ethics of Belief, 1877>에서 "충분한 증거가 없는 믿음을 갖는 것은 윤리적으로 잘못된 일"이라고 주한 바 있습니다. 
이에 윌리엄 제임스는 다음과 같이 재반박을 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신념은 완전히 검증할 수 없지만, 믿지 않으면 오히려 중요한 진리를 놓칠 수 있다"
 
성서는 믿음을 무엇이라고 정의하고 있는가, 믿음이 그리스도교에 미치는 영향을 볼 때 예수를 믿고,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의 말씀인 성서를 믿기 위해서 우리가 믿음의 정의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프랑스 철학자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은 그의 저서 <팡세>에서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한 부류는 "하느님을 찾은 사람"과 다른 한 부류는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느님을 찾은 사람이 이미 믿음을 수용한 사람이라면, 하느님을 찾는 사람은 아직 신앙을 가지지 않았지만, 진리를 탐구하며 신을 찾으려 하는 사람이라고 정의 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서 민수기 21장 8-9절에 대표적인 성서에서 말하는 믿음을 정의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望) 살리라." 
민수기의 이야기는 히브리인들이 모세의 인도를 받아 종 살이하던 애굽 땅에서 탈출하여 약속의 땅으로 가던 중에 오늘날 요르단 광야에서 40년간 하느님의 연단을 받았던 때의 이야기입니다.
이때 놋뱀을 바라보면 살고, 놋뱀을 바라보지 않은 사람은 하느님이 모두 죽이는 사건입니다.
"백성이 호르산에서 출발하여 홍해길을 따라 에돔 땅으로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민수기 4:4), 마음이 상한 히브리인들은 하느님을 원망함으로 하느님께서 불뱀을 보내어 원망하는 자를 죽이시고 이에 이스라엘이 회개하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었지만, 하느님은 히브리인들 중에 믿음이 있는 자들만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을 옅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믿음은 철저히 인간이 먼저 마음의 문을 열고 믿음 갖기를 결심할 때 하느님이 역사하시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최근에 만나는 지인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죽고 사는 것 둘 밖에 없습니다. 죽는 것은 내일 죽을지, 몇 십년 후에 죽을지 알 수 없으므로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두려움을 가져야 하는 것은 사는 것입니다.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사는 것이라면 그것은 본인의 의지에 따라 결정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죽을지, 살지도 본인이 결정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는 것은 우리의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듣는데,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사는게 더 힘든 것입니다. 잘 사는 것은 더 더 힘이 듭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향해 믿음을 갖는 이유는 죽음에 초점을 맞추는 것보다는 사는 것에 방점을 찍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은 죽음 후의 일을 위하여, 구원의 일을 위하여 예수를 믿는다고 합니다. 
믿으면 구원 받고 끝이라고 합니다. 
사실은 우리가 지금 사는 현실에서 예수의 생명을 가지고 사는 것을 묻기 위해, 하느님께 의지하는 믿음이 더 필요한 것이 아닐까요. 죽음은 우리의 영역이 아니지 않을까요. 나의 생명을 가지고, 믿음을 어떻게 지니고 살아야 할지, 이런 기도가 우리에게는 더 필요한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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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묵상
개역개정 히브리서 11장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